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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불교게시판 문답

공과 참나에 대해서

by 보명거사 2022. 12. 11.

무아가 해탈하니 해탈이 공한 자리라고 하는분들이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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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실체없음이란

오온을 말하는 것인데

허망한 오온이 해탈(작용)한다는 것은 망상

일체가합일되는 참나자리가 곧 해탈이라는분들이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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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모든 것=연기소생으로 허망한 것

허망한 것이 서로 합일한다는 것은 망상이며

망상이 참나라는 것은 참나가 뭔지를 모르는 것으로 희론

공한것도 결국 아무것도없는것 이지만 없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근원자리 라는 생각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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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번뇌없음

존재의 본질(마음,진여,여래,존재의 단절)=특징없음

강경 제17분 끝까지 我가 없음

究竟無我分 구경무아분

<산스크리트 본>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라고 하는 것은

진여(眞如)의 다른 이름이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생(生)하는 일이 없는

'존재의 본질'의 다른 이름이다

수보리여,

여래라고 하는 이는

'존재의 단절'(斷絶)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라는 이것은

궁극적으로 불생(不生)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여,

생(生)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기불교에서 말하는 참나상태나

초기불교의 공한 해탈상태나 전혀상충되는 개념은 아니란 생각이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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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진짜 나,가짜 나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고

여실한 것(실체가 있는 것)=마음=오직 마음뿐

가짜나에 상대하는 것이라는

용어에 혼란을 가져오는

참나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음

맛지마니까야,전재성 역주

특징이 없고,

한계가 없고,

모든 경우에 빛나는 (상주불멸)

의식이 있네.

- 이 구절은 완결된 시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불교학계의 영구적인 과제에 속한다.

불교의 진아(眞我)는 우파니샤드의 브라만(眞我)과 아트만(靈魂)이 서로 對하는 眞我가 아니고

오온(五蘊),가아(假我)에 집착하는 편견을 깨기위해 가시설(假施設)한 이름일뿐이고

아트만에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트만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진아(眞我)이니

부처님은 우파니샤드의 파괴자이다.

붓다고싸는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불리는 열반이 이 구절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경우에 빛나는'이라고 역자가 번역한 '쌉바또 빠밤(sabbato pabbam)'에 대하여 세 가지 설명이 있다.

① 완전히 광명을 갖춘

② 모든 곳에 존재하는

③ 열반이라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38가지의 명상의 대상을 통해 모든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울(pabbam).

언어학적으로 첫 번째 설명만이 정당하다.

空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전재성)

11. 그는 이와 같이 알고 또한 이와 같이 보아서

그 마음이 욕망의 번뇌에서 해탈되고

존재의 번뇌에서 해탈되고

무명의 번뇌에서 해탈된다.

​해탈되면 그에게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생겨난다.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욕망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존재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무명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 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은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되지 않고 청정한 공이 현현(顯現)된 것으로 나타난다.

청정한 공=마음에 번뇌없음=번뇌를 벗어난 마음

앙굿따라니까야, 빛남의 경(A 1:51,52)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에게는 마음의 수행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래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마음의 수행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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