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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다

by 보명거사 2019. 12. 22.
행위=업(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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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굿따라니까야,조건의 경 

11. [세존]
"미혹하여
탐욕에서 생겨나고
분노에서 생겨나고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크고 작은 행위를 저지르면,
세상에 그 과보를 받아야지
다른 가능성은 없으니.

수행승이라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분명히 알아
명지를 일으켜서
모든 나쁜 곳을 끊어 버려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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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존재=행위(업)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연기소생=의타기성= 실체없음=무아

앙굿따라니까야- 다사담마경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쌍윳따니까야-인연-자양분의 품-조건

8. 수행승들이여,
존재는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쌍윳따니까야-너것이 아님 경


1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이전의 행위(業)로 만들어진 것이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감수(느낌,니밋따,환영)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 수행승들이여, 그레서 고귀한 제자는 연기의 법칙을 듣고 철저하게 사유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능엄경
妄相發生 非本來有
 
그러나 다 허망한 생각으로 생긴 것이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5쌍윳따 쎌라

[쎌라]

이 환영은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원인을 연유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멸하면 사라져버리네.

마치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그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오온)

인식의 세계 ( ) 

또는 이들 감각영역들은(處)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리네.



쌍윳따 - 무상의 품

14) 실체가 없음(무아,Anatta)

1.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빤디까 승원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그는 분명히 안다."



쌍윳따니까야.수행녀


[빠삐만]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

뭇삶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뭇삶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뭇삶은 어디에서 사라지는가?"

 

[바지라]

"그대는 왜 뭇삶이라고 집착하는가?

악마여,그것은 그대의 사견일뿐.

 

단순한 행위(業)의 집적인데

여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오온,五蘊)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뭇삶=존재=행위자

괴로움(苦)=번뇌=業(행위) 만이 생겨나 머물다 사라진다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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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 나형외도경

[깟싸빠]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까?"
[세존]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깟싸빠]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세존]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괴로움(행위)는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깟싸빠]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세존]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깟싸빠]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세존]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행위(업)는 조건발생

  
[깟싸빠]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
[세존] "깟싸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깟싸빠여,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행위는 있다)

 
[깟싸빠] "그렇다면 세존 고따마께서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존] "깟싸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보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깟싸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안다. 깟싸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본다."

 [깟싸빠]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수행자께서는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수행자께서는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수행자께서는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수행자께서는 '깟싸빠여,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행자께서는 '깟싸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깟싸빠여,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 고따마께서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수행자께서는 '깟싸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보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깟싸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안다. 깟싸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본다' 고 대답했습니다.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보여주십시오.
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가르쳐주십시오."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 고 처음부터 주장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영원주의( 常見, 常住論)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 고 주장하여
괴로움을 받게 됨으로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 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허무주의(斷見, 斷滅論)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연기의 법칙)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행위(업)은 번뇌에 오염된 마음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

앙굿따라니까야, 빛나는 마음의 경(A1.49)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에게는 마음의 수행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래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마음의 수행이 있다고 말한다.



中論
8 觀作作者品(12)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관찰

8-1) 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라면 결정적인 행위를 짓지 못한다.


(업을 짓는다면 이미 빛나는 마음(진여)이 아니다,

그러므로 업을 짓는 행위자는 번뇌에 오염된 마음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실체가 없는 것)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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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

性有空 緣生故如幻참 성품에는 유위가 공하건만 
진성유위공  연생고여환인연으로 생기니 허깨비와 같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
無起滅 不實如空花무위는 기멸(起滅)이 없으니 
무위무기멸  불실여공화실답지 못함이 공화(空華)와 같느니라.(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
言妄顯諸同二妄망(妄)을 말하여 진(眞)을 나타낸다면
언망현제진  망진동이망망과 진 둘 모두가 망이요   
猶非云何見所見진(眞)도 진 아님(非眞)도 아니거늘 
유비진비진  운하견소견어찌 견(見)과 소견(所見)이리요
中間無實性 是故若交蘆중간이란 진실한 성품이 없나니 
붕간무실성  시고약교로그렇기에 교차하는 갈대와 같고
結解同所因 聖凡無二路결(結)과 해(解)가 소인(所因)이 같아서
결해동소인  성범무이로성(聖)과 범(凡)이 두 길이 없느니라.
汝觀交中性 空有二俱非네가 교차하는 중간의 성품을 보라(연기)
여관교중성  공유이구비공(空)과 유(有) 둘 다 아니니
迷晦即無明 發明便解脫미혹하면 곧 무명이요 
미회즉무명  발명변해탈발명(發明)하면 곧 해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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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有인 짓는 자(作者)가 實有인 업을 짓는 것은 아니다. 

또 非實有(虛無)인 짓는 자(作者)가 非實有인 업을 짓는 것도 아니다.




8-2) 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에는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작용도 없고 행위도 없다.


짓는 업(作業)이 실제 존재하는 것(實有)일 때에는 작용은 없어도 된다. 그리고 짓는 업은 짓는 자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짓는 자가 實有일 때에도 작용은 없어도 된다. 그리고 짓는 자는 짓는 업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8-3) 若定有作者亦定有作業作者及作業卽墮於無因


만일 행위자도 결정적으로 존재하고 행위도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無因論 떨어진다.



만일 非實有(실제로 존재하지 않는)인 짓는 자가 非實有인 업을 짓는다고 하면, 

업을 짓는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고 짓는 자도 원인 없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8-4)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일 無因論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고 행위도 없게 된다.


因이 없을 때는 業도 因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因이 없을 때에는 작용과 짓는 자(作者)와 작용하는 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8-5) 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일 작용등의 법이 없다면 죄나 복(등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나 복(등의 법)이 없기에 죄나 복의 과보도 없다.


작용 등이 없을 때에는 法과 법 아닌 것(非法) 혹은 罪와 福의 둘은 없다. 

법과 법 아닌 것이 없을 때에는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果報도 없는 것이 된다.



8-6) 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일 죄와 복의 과보가 없다면 열반도 역시 없다.

또 있을 수 있는 모든 작용도 모두 하여 그 결과가 없다.


죄와 복의 果報가 없을 때에는 解脫이나 涅槃의 길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行하는 바가 소용(果) 없는 것이 될 것이다.

 



8-7)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결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두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

서로 위배되므로 한 곳에 ( )두가지는 없다.


實有·非實有인 짓는 자는 實有·非實有인 짓는 업을 하지 않는다. 

實有·非實有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니 어떻게 한 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8-8)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지을 수 없고 무가 유를 지을 수 없다.

만일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實有(실제 존재)인 짓는 자에 의하여 非實有(실제 존재하지 않는)인 짓는 업은 행해지지 않는다. 

또 非實有인 짓는 자에 의하여 實有인 짓는 업은 행해지지 않는다. 그 모든 잘못이 여기에서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8-9)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행위자는 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거나

결정적이면서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그 과실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實有인 짓는 자는 非實有인 짓는 업을, 

또 實有·非實有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8-10) 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행위자가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건 

행위를 행할 수 없다.그 과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非實有)인 짓는 자는 실제 존재(實有)인 짓는 업을, 

實有·非實有인 짓는 업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8-11) 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행위로 인하여 행위자가 존재하고 행위자로 인하여 행위가 존재한다.

행위가 이룩되는 이치는 이와 같아서 다시 어떤 다른 일은 없다.


짓는 자가 實有·非實有일 때 實有인 작업이나 非實有인 업 짓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8-12)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행위와 행위자를 논파하듯이 取者 마찬가지다.

또 일체의 존재도 역시 응당 이와 같이 논파해야 하리라.


업을 짓는 자[작용 주체]는 업[작용]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고, 또 업을 짓는 자로 말미암아 업이 있게 된다. 이 밖에 업과 업을 짓는 자를 성립시키는 어떠한 원인도 있을 수 없다.(MS 8.12) 


행위에 의해 행위 주체가 있다. 또 그 행위 주체에 의해 행위가 작용한다. 그 외의 성립의 원인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MS 8.12)


업을 짓는 자는 짓는 업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고, 그리고 그 짓는 자로 말미암아 짓는 업이 있게 된다. 이밖에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어떠한 因도 우리는 보지 못했다.

 

<해설>
이것은 보시에 있어서 보시하는 자와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 받는 자, 삼자가 모두  空하다는 이른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도리와 같다. 보시 행위는 앞의 삼자가 모두 존재할 때만이 가능하다.
셋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보시라는 행위는 발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 행위를 구성함에 있어서 삼자는 상호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언어적 틀 속에서 마치 보시하는 물건이나 받는 사람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보시자라는 관념을 형성하기 쉽다. 그러나 보시자라는 것은 자체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아니라 나머지 두 가지 요소에 의존해서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연기의 의존성이다. 인용문에서는 어떤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가 독립적인 실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함으로써 서로를 성립시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해>
연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pratitya-samutpada이다. 이것은 [여러 조건들이] 상호의존해서[pratitya] 일어난 것[samutpada]이라는 의미이다.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여 dependent origination (의존적 발생)으로 흔히 영역된다. 한역으로는 쿠마라지바가『중론』에서 인연(因緣),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중인연(重因緣)으로 번역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조건인 연(緣)의 화합에 의해 生起하는 것이다.

 

13. Likewise, one should understand clinging, because act and actor are dispelled. Remaining things too should be understood by means of actor and act.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이와 같이 업을 지음과 업을 짓는 이를 타파하듯이, 느낌과 느끼는 이도 그렇게 하며, 그 밖의 온갖 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타파되어야 한다.(MS 8.13)


業과 業을 짓는 者를 타파한 것처럼 取하는 것과 取하는 자도 알아야 한다. 짓는 자와 짓는 업에 의거하여 그 밖의 모든 것도 고찰되어야 한다.

 

<해설>
업과 업을 짓는 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집착이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집착을 일으키는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감정이나 의지를 상정한다. 그러나 집착은 집착하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집착이 되고, 집착하는 자 역시 그가 집착할 때 집착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 집착하고 있지 않는데도 ‘저 사람은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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