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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이 원래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지 않나요 근데 자비의 마음은 형성된다고 하는데 설명좀 해주세요

보명거사 2022. 11. 18. 09:17

석가모니랑 지눌 둘 다 불성이 원래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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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은 마음의 깨닫는 성품

불(佛)=깨달음=각(覺)=앎=알음알이

그러므로

불성이 사람에게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유신견으로 삿된 견해

불성은 본래부터 (만들어 지지 않은,생겨나지 않은 ) 마음의 성품이라는 것

쿳따까니까야 열반의 경 ③(Tatiyanibbānasutta, Ud8-3)

[세존]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들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

본연의 마음은 특징이 없어 존재(相)가 空한 것,그러나 앎이 있는 것=진공묘유,공적영지

맛지마니까야,空에 대한 작은 경

11. 그는 이와 같이 알고 또한 이와 같이 보아서

그 마음이 욕망의 번뇌에서 해탈되고

존재의 번뇌에서 해탈되고 무명의 번뇌에서해탈된다.

해탈되면 그에게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생겨난다.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욕망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존재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알고,

‘이 지각의 세계는 무명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 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 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은 그에게 진실되고 전도되지 않고 청정한 공이 현현 된것 (覺,불성)으로 나타난다.

분명히 안다(여실지견)=청정한 공(無相=마음,불성)이 현현 된 것

앙굿따라니까야, 빛나는 마음의 경(A1.49)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에게는 마음의 수행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마음이 번뇌에 오염되면 무명을 조건으로 마음작용(연기와 연생)이 생겨나고

실체없는 연기와 연생(제법무아=일체개공=오온개공)을

실체 있는 것(유아견,유신견,자아의식)으로 잘못 아는 것=존재에 대한 집착=전도망상

실체없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로 있는 것으로 잘못 파악하면

너와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망상이 생겨나고

나라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에게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識,번뇌망상)이 생겨나는 것

본연의 마음에서 자비와 연민의 마음(생각,識)이 생겨나는 것=行,業

쌍윳따니까야 12:20 조건의 경[ paccayasutta)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이것(여실한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여실한 마음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존재,환영)이 생겨나는 것이 연기(마음작용)

물이 있어야 물거품이 일어나듯,마음을 조건으로 마음작용이 생겨나는 것

​자비와 연민의 마음(사무량심)은 마음(體)에서 생겨나는 마음작용=연기(用)와 연생(相)의 법

​자비와 연민의 마음(사무량심)은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하기 위해 일으켜야 하는 마음작용

땟목의 법

맛지마 니까야: 22 알라갓두빠마 경 13,14

비구들이여,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그대들에게 설하겠노라.

 

어떤 사람이 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크고 깊고 넓은 강을 만났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있는 쪽은 두렵고 위험한 반면,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저 쪽으로 건너는 다리도 배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편 언덕은 안전하다. 그런데 건널 다리도 배도 없다. 그러니 갈대,

나무 막대기, 나뭇가지, 나뭇잎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너가면 어떨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여 강을 건널 것이다.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도착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땟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이 언덕에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러니 니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든지 어깨에 짊어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그가 취하여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도착한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이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제 이 뗏목을 마른 땅으로

끌어올려 두든지 아니면 물속에 잠수 시키고 내 갈길을 가면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해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설하였다.

 

가르침이 뗏목과 비슷함을 안다면 좋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것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